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이스팅스 전투 (문단 편집) == 의의 ==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의 저항들을 차례차례 진압하고 결국 잉글랜드 정복에 성공하였다. 이는 '''[[노르만 정복]]이라 불리며, 당시 잉글랜드의 정치, 사회, 문화, 언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윌리엄 1세를 '''정복왕 윌리엄'''이라 부르는 것도 이 노르만 정복에서 유래된 것이다. 침공군인 윌리엄의 군대가 노르만족이라는 사실 때문에 바이킹인 윌리엄과 잉글랜드인인 해럴드의 싸움이라는 인식이 있으나, 실상은 정반대이다. 노르만족은 프랑스 북부에 정착한 바이킹들을 뜻하는 말로, 일찌감치 프랑스화되어 완전한 유럽인이 된 반면, 잉글랜드는 섬나라인 탓에 대륙의 영향이 미미한 대신 오랜 기간 스칸디나비아에서 쳐들어오는 바이킹의 영향을 받아 문화적으로 거의 바이킹에 가깝게 변모한 상태였다. 이미 [[칠왕국]] 말기에 [[이교도 대군세]]로 불리는 대대적인 바이킹의 침략으로 브리튼 섬 거의 전체가 데인족에 정복당한 바 있고, 이후에도 [[스벤 1세]], [[크누트 대왕]] 등에 의해 잠시 덴마크계 왕조가 들어섰을 정도로 바이킹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다. 당연히 해럴드 본인 또한 생물학적으로는 토착 잉글랜드인이지만 문화적으로는 그런 바이킹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헤이스팅스 전투는 오히려 바이킹 문화권에 해당했던 잉글랜드가 유럽 문화권으로 탈바꿈하여 로마의 몰락 이후로 반쯤은 유럽과 분리되었던 잉글랜드의 역사를 '유럽사'의 한 분류로 끌어들였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언어학적 시점으로 이 전투가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는데''' 이 전투의 패배로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가 세워지면서 약 300여 년간 잉글랜드의 귀족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하게 되어 '''[[영어]]에 프랑스어 어휘가 다량으로 침투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전투를 기점으로 그 악명높은 '''[[대모음추이]]가 생겨났고 [[문법적 성]]이 사라졌다는 가설이 있다.'''] [[라틴어]]의 영향을 받은 언어 중에서 유독 영어에 프랑스어 어휘가 많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더군다나 궁정 인물들과는 다르게 평민들은 그대로 영어를 쓴 탓에 (예시를 들어) [[가축]]과 그 가축의 [[고기]]의 어원이 다른 언어로는 영어가 유일하다. 예를 들어, 소는 영어로 cow지만 쇠고기는 beef이고, 돼지는 pig인데 돼지고기는 pork다. 이는 소의 프랑스어 bœuf와 돼지의 프랑스어 porc가 변형된 것이다. 이 외에도 양(sheep)과 양고기(mutton), 사슴(deer)과 사슴고기(venison), 멧돼지(wild boar)와 멧돼지고기(brawn)도 각각 다르다. 높으신 분들에게 고기를 대접하며 무슨 고기인지 프랑스어로 소개했던 것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이다. 만약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노르망디군이 패배했다면 오늘날의 잉글랜드 지역은 문화적으로 북유럽권에 가까웠을 것이며, 그에 따라 현대 영어에도 북게르만계 언어의 어휘가 실제보다 훨씬 많이 침투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프랑스어 어휘는 현대 영어에 침투하는 정도가 실제보다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채널 제도]]는 프랑스의 영토가 되거나 해당 대체역사에서 프랑스 본토와 별개의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노르망디의 영토로 남았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후대 잉글랜드인들에게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의 명군 윌리엄 1세가 아니라 노르만족 침략자 기욤 2세로 기억되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